태정루 탄금대

독도의 진실, 역사의 진실 - 호사카 유지 교수

태정 (泰亭) 2006. 7. 2. 23:06

"역사적인 관점에서 한국과 일본이 어떻게 대립했는지 살펴보고 우리가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국제법에 의거해 설명하겠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내마음은 몹시 흥분했다. 일본 국적을 버리고 한국인으로 귀화한 교수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반박한다는 그 한 마디에 솔깃해진 것이다. 세종대 일어일문학과 교수와 세종사이버대 교양학부 겸임교수를 겸하고 있으면서 이미 '일본에 절대 당하지 말라' '일본제국주의의 민족동화정책 분석' '일본 고지도에도 독도 없다' 등의 저서를 통해 독도가 한국영토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손꼽아 기다리다 간 곳은 세종대 충무관. 요새 대학교 공개강좌는 지역주민들에게도 개방되어 있어 모처럼 관심있는 주제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겠다 싶어 내심 큰 기대를 갖고 갔다. 일을 마무리하고 급히 갔으나 30분 정도 늦었다. 하지만 공개강좌가 늦게 시작되어 한 10분 정도밖에 놓치지 않은 것 같았다. (2006년 5월 25일 저녁 7시 -9시, 호사카 유지 (50) 세종대 및 세종사이버대 교수) 

 

수업받으며 메모한 내용을 간추려 관심가진 분들의 이해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 영유권 논리의 시각

   - 인지를 누가 먼저 했는가?

   - 역사적 실효지배는 누가 했는가?

   - 누가 먼저 해외에 영유권을 선언했는가?

   - 법적으로는 어느 나라의 영토인가?

 

1. 인지를 누가 먼저 했는가?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에 처음 우산도와 무릉도가 나타나며 1년에, 우산도(현재 울릉도)에서 일년에 60일간 무릉도(현재의 독도)를 바라볼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의 경우 1667년에 편찬된 은주시청합기에 울릉도, 독도라는 표현이 나오지만 이는 조선의 영토로 표기되어 있고, 운주(시마네현 이즈모)와 은주(오키 섬)에 대한 언급이 되어 있는데 그 기록에는 ".. 그러므로 일본의 북서쪽 경계는 이 州로 한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일본에서 섬을 주로 표현하는 것은 오키 섬밖에 없다는 사실이 2005년도에 객관적인 일본 학자들에 의해 발표된 논문에 나와있다고 합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1531년도에 조선에서 발행된 '팔도총도'라는 지도에는 울릉도와 독도의 위치가 거꾸로 되어 있을 뿐 이미 확실하게 표기되어 있는 반면, 당시 발행된 일본 지도에는 아직 표시조차 안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잘못된 섬의 위치는 18세기 후반이 되면서 정확하게 표시되었다고 하네요.

 

2. 실효지배의 여부

 

일본의 경우 1603-1867년간 일본을 지배한 에도막부가 1618년 - 1696년까지 78년간 "다케시마 (독도)"는 조선영토라고 인정하여 일본 사람들이 울릉도에 도해하는 것을 금지시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도해는 금지되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존재가 확인된 에도 시대의 관인 지도 6매에도 독도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네요.

 

일본의 서한에도 독도를 조선의 속도로 본다는 사실이 나와 있고, 마츠시마(독도)가 다케시마(울릉도)의 속도라고까지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최근 발견된 일본의 고문에도 나와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막부가 각 번에 명령하여 지역별 지도를 받아 그대로 통합해 만든 1655년 발간 '쇼호 일본지도'에 독도는 아직 표시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리고 15년 동안 걸어 다니며 실측을 해서 만든 일본 서부 지역 지도인 '대일본연해여지전도 (1821년간)에도 독도는 안타나 있는데, 이 때 지도를 작성한 사람은 매우 박식한 학자로 이전에 제작된 5종의 지도를 전부 숙지하고 있었는데도 이러헥 독도에 대해서 만큼은 깜깜했다고 합니다. 이게 무지에서 비롯된걸까요?

 

제가 가장 중요하게 받아들인 것은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메이지 시대(1868-1912)'의 자료들인데 이 시대의 문헌과 지도는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을 부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17세기 중반에 잠시 있었던 일본영유 주장을 완전히 무효화 하는 것이랍니다.

 

당시의 내각인 '태정관'이 시마네현을 판도 외로 정한다고 공시하고 다케시마의 일도는 본방(일본)과 관계없다고 선언한 사실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도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두 사람(가와카이 겐조, 시모조 마사오)은 메이지 시대의 일본 관인지도에도 독도는 일본영토로 아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참 웃기고 허접한 얘깁니다.

 

한데, 1881년에 일본의 지리국이 편찬한 대일본국전도에 독도는 영토로 표시되어 있지 않은 반면, '조어도'는 자국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근데 어떻게 독도를 자기 땅이라고 주장하는지 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간단히 말해, 초등학교 교과서 및 모든 관제지도에는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1905년 전에는 독도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 한 가지 만으로도 일본이 독도를 실효지배했다는 주장을 근거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3. 영토로 선언

 

1900년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울릉군이 표현되어 있는데, 울릉군은 울릉도 섬 전체와 죽도, 석도를 포함한다라고 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본은 1905년 시마네현에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독도를 편입한다고 하면서, 다케시마는 폭력으로 강탈한 영토가 아니다라고 했답니다. 이 부분은 참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얼토당토 않고, 가당치도 않습니다만, 그렇게 씌여있다고 하네요.

 

1905년, 당시 일본은 동해를 강점하고 있었고,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 제7조의 침략주의적 조항에 의거해 독도를 편입하기 전에 실제 측량을 한 사실이 있는데, 이런 측량만 가지고 실효지배로 볼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사실을 비밀리에 실행한 후 1906년 한국에 알렸는데, 이 때는 이미 을사보호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박탈당해 있던 시절입니다. 호사카 교수는 이 1905년 법이 1877년에 발표된 일본 정부의 공문서를 무시한 행위로 실효성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4. 법적 상황

 

한국전쟁 중인 1952년 4월 발효된 대일강화조약에는 한반도,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만 언급이 되고 독도는 빠져있다.

 

그리고 1946년 연합군 사령부 문서에는 독도가 한국영토로 명기되어 있지 않은데, 미국이 일본에게 독도를 넘겨 줄 목적으로 조약 그 자체에서는 독도라는 이름을 제외했다. 

 

(반박: 역사적으로 한국 땅인 독도를 미국 독단으로 일본에 할양해 줄 권리가 없다 - 호사카)

 

1965년 한일협정에서 "독도문제란 없다"라는 태도로 일관하며, 협정에 독도에 관한 내용을 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한일간에 독도문제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1977년까지 아무 말을 안했답니다. 그러다 EEZ 200해리 안이 UN에 의해 발표되자 마자 태도가 돌변한 것이며, 1994년 그 안이 선포되자 독도 영유화 문제에 대한 자기영토 주장을 강화하며 자민당이 강력하게 거론해 오고 있는 것이다.

 

5. 그럼 어떻게 대응하면 좋은가?

 

매우 유순한 대응방법이지만 호사카 유지 교수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 일본 내에서 역사적 사실을 적극 홍보한다

      (홍보사이트 운영, 전문서적, 홍보책자, 안내브로셔 등 발간)

   - 다양한 노력을 한다 (일본인들은 합리적이다)

      (민간 교류, 학술교류, 적극적인 자세 등등)

      (일본은 민주국가이며 정부의 주장과 국민의 믿음은 서로 다를 수 있고, 그리 큰 관심사도 아닐 수 있다)

   - 우리 측 자료와 논리가 세계에서 인정받도록 국제사회의 룰에 따라 홍보활동을 진행한다. 

 

결론적으로 우리 마누라를 우리 마누라라고 증명할 필요가 뭐가 있느냐... 바로 같은 논리다. 그러나 제 3자가 봤을 때도 과연 그렇게 생각하겠는가?

 

 

 

아주 명쾌한 결론이지만, 참 쉽지 않은 과제입니다. 고집센 상놈 집단이 정말 늬 마누라 맞냐고 물어 뜯으면서 달라 들면 골치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 후 질의응답도 있었지만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하지만, 호사카 교수는 현재 우리 정부가 잘 대처하고 있으며, 다양한 대응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는 한국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