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 사랑방] '닫힌 시대, 열린 글'
어제 토요일 오후에는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이 한국관광공사와 공동으로 주관하는 <우리문화 사랑방> 강좌에 다녀 왔습니다. 조느라 내용을 제대로 듣진 못했지만 서울시 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위원이신 이상배 선생님의 강의로 진행된 이번 세션에서는 그 옛날 서민의 소통이 상하로 막혀 있던 왕조시대부터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어 왔다는 군요. 이름하여 대자보. 그러나 그건 중국 용어이고, 우리 역사 속에 나타나는 대자보는 '괘서(掛書)랍니다. 투서, 비서, 벽서 등등 괘서의 종류가 참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이런 괘서의 역사가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진성왕 2년인 888년에 처음 나왔고, 고려시대에도 여러 건의 익명서가 나붙었다고 '고려사'가 전하고 있답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백성들의 의사표현 수단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고 하는군요. 관리들이 주로 사용한 상소와 백성들이 사용한 민소로 나뉘었는데, 각종 익명서로는 괘서를 비롯하여 투서, 벽서, 산호, 와언, 거화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그러데 중요한 것은 (조선시대의) 이런 괘서들 중 주모자가 확인된 괘서사건 17건 가운데 지식인들이 약 47%를 차지했다고 하는데 식자계층에서도 이렇게 비판의식이 많았다는 것이 요상합니다. 그 양반들이 왜 공식 소통 루트가 아닌 비공식 방법을 택했을까요?
한 가지 새롭게 배운 것은 신문고에 대한 것이었는데요.... 이를 사용하는 데 대한 너무 엄격한 절차 때문에 실제 사용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신문고를 필 수 있는 자격과 조건도 까다로운데다 신문고가 창덕궁 안에 설치되어 있어 궐문을 들어가야만 했기 때문이었다구요. 그럼 신문고는 왜? 전시행정의 일환으로 출범된 것인데 그냥 없애기는 뭐하고 해서 유지 존속시켰다고 합니다. 어쨋든 기록상으로 신문고를 통해 뭔가 억울함을 해결했다고 기록된 것이 없다고 하니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일이네요. 그런데, 요즘에도 청와대에 국민의 정부인가에서 건 신문고가 그대로 걸려 있다고 하니 전시행정을 시공을 초월한 것인가 봅니다.
이렇게 재미있는 기록들이 실록에 있는 것일까요? 승정원일기에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조선시대의 재판기록을 일일이 살펴보고 찾아낸 것이랍니다. 죄를 진 사람들의 '대질심문'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분석 가능했다고 합니다. 기록이 역사를 낳는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 역사는 해석하는대로 만들어진다. 여러가지가정들이 머리를 스쳐 갑니다... 어쨋든 재미있는 강의였습니다. 다음 달에도 또 갈 계획입니다.
강의가 끝나고 멋있게 변한 청계천을 잠시 둘러보았습니다. 상전벽해라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