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정루 탄금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the devil wears prada)

태정 (泰亭) 2007. 3. 26. 23:56

어느 일하는 하루를 이렇게 경쾌하게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란 생각을 하게 만드는 멋진 BGM으로 시작하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참 독특한 영화다. 혼을 빼앗는다는 느낌이 드는 기막힌 음악으로 캐스팅 만큼이나 성공적인 음악이라고 믿는다. 그 어떤 영화보다 몰입이 강했던, 그래서 기억에 남는 인상 또한 강하고 파괴적이다.

 

오랜 만에 보는 프로의 세계다. 프로들만이 아는 프로의 세계에서 프로답게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일깨워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표면적으로는 적어도 (이런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거나 암묵적으로 전제가 되는)  office politics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패셔니스트를 내세운 페미니스트 영화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보고 느낀 것은 페미니스트를 거부하는 비즈니스 계의 거물 여성 전문가가 보여주는 진정한 프로페셔널리즘이다. 

 

실감 이상의 전율을 느끼게 하는 보스의 존재감. 가장 두드러진 테마이자 이 영화의 핵심 성공요소다. 그 역을 메릴 스트립 만큼 잘 소화할 수 있는 배우가 있었을까 싶도록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는 그녀다. 캐스팅의 힘이 영화 성공의 힘이라는 등식이 성립함을 다시 한 번 보았다. 적어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성공한 영화였다면 그 성공의 80%는 미란다 (메릴 스트립 분)의 120% 연기력에 있을 것이다. 그녀가 무표정하게 내뱉는 "That's all."이 그렇게 시니컬하게 들린 적은 없다. '수고했다'라는 뉘앙스로 들려야 할 이 말이 "됐어, 가 봐. (뭐 그까이 것을 가지고...)." 아마 그녀로부터 그 말을 들은 앤디(안드리아 섹스, Anne Hathway 분)의 가슴은 철렁 했으리라.

 

'tiny man, huge ego'를 자랑하는 패션계의 거물들이 Runway라는 최고급 프리미엄 패션 잡지 발간 과정에 겪는 에피소드들로 이뤄지는 이 영화는 소재도 독특하거니와 프라다라는 명품들이 시종 보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보너스도 있다. 물론 뭐가 뭔지 모르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앤디가 초기에 입고 다닌 수수한 차림이 훨씬 마음에 들지만... 그렇게 패션에는 관심도 없고, 취향도 달랐던 그녀가 정말 프라다를 대변하는 패션 모델처럼 변화되어 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 즐겁다. 눈이 크고, 머리칼이 길고, 몸매가 받쳐주기 때문에 앤이 간접적으로 프라다의 모델이 된 것이리라. 미란다가 보스의 카리스마로 승부를 걸었다면, 앤디는 프로다운 비서역할로 오히려 미란다의 기대를 뛰어 넘는 활약을 했다.

 

가장 센세이셔널한 장면은 미란다가 갑자기 일정을 바꿔 오전 9시까지 사무실에 출근하게 된 것을 안 직원들이 그녀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초기 도입 부분이다. 사실 그 장면 한 3분이 '악마는 ...'의 포지셔닝에 거의 모든 힌트를 제공해준다. 사람됨과 업무 스타일, 기대수준, 성격과 관리스타일, 보스로서의 기질, 부하직원을 다루는 방법, 인생의 비전, 찔러도 피 한 방울 날 것 같지 않은 냉정함 ... 이건 정말 보지 않고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의 호들갑 전쟁 수준이다. 그런데도, 그 과정이 엄숙하게 장엄하게 그리고 긴박하게 와닿는 것은 회사 생활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공감이 가기 때문일 것이다. 훌륭한 보스 맞이를 위한 완벽한 준비의식일까? 겉으로만 존경받고, 주어진 카리스마가 아니라 자기가 만든 오라(aura) 속에 사는 환상가를 맞기 위한 가식에 찬 허례일까?

 

스스로 만든 카리스마라도 그게 보스의 스타일로 굳어지고, 모든 직원들이 그 스타일에 걸맞는 존경을 가지고 그 보스를 대한다면 그 보스는 존경받을 가치를 가진 보스라는 믿음을 갖게 해준 영화. 그리고 그런 보스에게 인정을 받고자 노력하는 과정에 겪는 애인과의 사랑 싸움. 일이냐 사랑이냐의 식상한 공식 속에 사랑이 다뤄지지 않는 것 또한 새롭다. 패선계의 차세대로 부상할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결국은 옛애인을 찾아간 앤디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본성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주지 않는 보스를 보란듯이 차버릴 줄 아는 순수한 마음이 좋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미란다는, 앤디가 다음 직장을 잡는데 최고의 레퍼런스를 제공한다. "그녀가 내곁을 떠나는 것은 더없는 실망(disappointment)이지만, 그 실망이 그녀의 가고자 하는 전도에 방해가 되게 하고 싶지는 않다"는 최고의 찬사를 보낸 것이다. 그런 미란다에게 찾아온 두 번째 이혼 예고. 하지만 일과 개인생활을 철저하게 구분하는 그녀에게 이혼은 있을 수 있지만, 또 다시 방황하게 될 두 딸의 미래에 대한 근심만은 지우지 못하는 모습을 보고 은근한 연민의 정이 생긴다. 그 모든 당당함에도 불구하고 자녀에 대한 생각을 할 땐 눈시울을 적시는 그녀다. 결국, 그녀도 내면은 인간적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메릴 스트립의 연기를 좋아하는 분들이나 프로페셔널리즘에 대해 잠깐이라도 생각해 볼 여유가 있는 분들께 반드시 보실 것을 권하고 싶다. 100분 정도의 시간 투자로 몸과 마음이 충전되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